삼국지 - 순욱, 조조 아래서의 활약과 침묵

연주의 밤공기는 무겁고 짙었다.
성벽 위에 선 순욱은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와 횃불의 물결을 바라보며, 이곳이 더는 평온한 땅이 아님을 실감했다.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떠난 뒤, 연주성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그러나 순욱의 눈빛만은 흔들림이 없었다.
여포와 진궁이 연주를 포위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성안은 금세 공포로 뒤덮였다.
“공자님, 적군이 성을 에워쌌답니다!”
진수의 다급한 목소리에, 순욱은 조용히 손을 들어 병사들을 진정시켰다.
“두려워 말라. 성이 무너지는 건 칼과 불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무너질 때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순욱은 곡식을 아껴 백성들과 병사들에게 나누어주고, 밤마다 성벽을 돌며 직접 병사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이곳에 있는 한, 연주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포위가 길어지자 식량은 바닥나고, 병사들은 지쳐갔다.
어느 날, 한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곡식 한 줌을 내밀었다.
“공자님, 이건 우리 집 마지막 쌀입니다. 모두를 위해 써주십시오.”
순욱은 노인의 손을 꼭 잡았다.
“이 마음이 있다면, 연주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성 밖에서는 여포의 군사들이 북을 울리며 항복을 권유했다.
“순욱,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성루 위에서 순욱은 단호히 외쳤다.
“나는 조조의 사람이다. 연주는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
그 외침은 바람을 타고 성안 구석구석 번져나갔다.
밤이 깊어질수록, 순욱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식량은 점점 줄고,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밤마다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성벽 위에서 밤을 새우던 어느 날, 멀리서 조조의 군기와 함성이 들려왔다.
병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조조가 돌아온 것이다.
성문이 열리고, 조조는 먼지투성이 순욱을 끌어안았다.
“문약, 그대가 아니었다면 나는 집도 없이 떠돌았을 것이오!”
그날 이후, 조조는 순욱을 더욱 신임했다.
내정과 군정, 인사와 법령, 어느 것 하나 순욱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조조가 전장에 나설 때마다 순욱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문약, 내가 없는 동안 백성을 지키고, 나라의 기틀을 다져주게.”
순욱은 고개를 숙였다.
“이 몸을 바쳐 주공의 뜻을 이루겠습니다.”
순욱은 곽가, 순유, 종요, 희지재 등 수많은 인재를 조조에게 천거했다.
그들은 각자 전장에서, 내정에서, 조조의 천하경영을 뒷받침했다.
순욱은 법령을 정비하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농토를 복구하며,
기근이 들면 구휼을 펼쳤다.
백성들은 순욱을 ‘왕좌의 재주’라 칭송했다.
관도대전이 다가오자, 조조 진영은 불안에 휩싸였다.
군사들은 원소의 대군에 두려워했고, 장수들 사이에서도 패배의 기운이 감돌았다.
그때 순욱이 조용히 조조 곁에 다가가 속삭였다.
“주공, 원소는 세력이 크지만 우유부단합니다.
우리 쪽은 군심이 하나로 뭉쳐 있고,
주공께서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통찰이 있습니다.
필승의 기회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조조는 순욱의 말을 듣고 결심을 굳혔다.
관도대전의 밤, 순욱은 군량을 아껴가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결국 조조는 원소를 무너뜨렸고, 그 승리의 뒤에는 순욱의 냉철한 분석과 조언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조조의 권력이 커질수록,
그는 점차 한실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왕국을 꿈꾸기 시작했다.
순욱의 마음에는 깊은 고민이 깃들었다.
어느 날, 조조가 순욱을 불렀다.
“문약, 이제 한나라가 무너진 지 오래요.
내가 위공(魏公)이 되어 새 시대를 열고자 하오.”
순욱은 침묵했다.
그의 충심은 한실에 있었다.
그는 조조의 야망이 한나라의 마지막 불씨마저 꺼뜨릴까 두려웠다.
그날 밤, 순욱은 홀로 촛불 아래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바라던 대의는 이런 것이 아니었건만…”
조조는 순욱의 충심을 알고 있었지만,
점차 그와의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어느 날, 빈 찬합이 순욱의 책상 위에 놓였다.
“이제 그대가 먹을 것은 없다”는 암시였다.
순욱은 조용히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아무 말 없이 조조의 곁을 떠났다.
순욱이 떠난 뒤, 조조는 한동안 빈자리를 바라보며 탄식했다.
“문약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겠는가…”
연주의 밤하늘 아래, 순욱의 이름은
여전히 백성들의 입에, 장수들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가 남긴 것은 단지 책략과 내정만이 아니었다.
위나라의 기틀, 백성을 위한 마음, 그리고
어떤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는 충심과 결의였다.
그리하여,
순욱은 조조 아래에서
책사이자 동지, 그리고 시대의 등불로
영원히 기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