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주 땅의 여름은 짙은 녹음과 습한 바람, 그리고 불안한 소문으로 가득했다. 순욱은 영천을 떠나온 뒤, 한복의 초청을 받아 기주에 머물고 있었으나, 마음 한구석에는 늘 허전함과 긴장감이 맴돌았다. 한복은 인자하고 예의 바른 인물이었지만, 결단력과 대업을 이룰 기개가 부족했다. 순욱은 매일같이 조정의 소문과 각지 군웅의 동향을 살피며, 이 난세를 평정할 진정한 그릇이 누구인지 고민했다.
한복의 관저에는 각지에서 모여든 인재와 피란민, 그리고 군사들이 뒤섞여 있었다. 순욱은 새벽마다 정원에서 책을 읽으며, 자신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지곤 했다. 어느 날, 한복이 순욱을 불렀다.
“문약,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오기로 했다네. 자네도 함께 자리를 해주게.”
순욱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한복의 응접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여러 명의 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사내가 있었다. 검은 눈동자에 날카로운 기운, 짧은 수염, 단단한 체구. 그는 조용히 한복에게 인사를 올린 뒤, 곧장 순욱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하북의 조조, 자는 맹덕이라 하오.”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순욱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조조 역시 순욱을 흘끗 훑어보더니, 한복을 향해 말했다.
“순공이 이곳에 있다 들었소.
내 오래도록 순공의 명성을 들었으니, 오늘 꼭 만나보고 싶었소.”
한복은 두 사람을 마주 앉혔다.
순욱은 조조의 눈빛에서 흔들림 없는 야심과, 자신과 같은 시대의 위기를 꿰뚫는 통찰을 읽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조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순공, 세상이 어지럽소.
군웅은 난립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소.
나는 옛 조정에 미련이 없소.
이 난세를 바로잡을 뜻이 있다면, 함께 뜻을 모으고 싶소.”
순욱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맹덕공, 저 역시 조정의 썩은 기운을 견디지 못해 이곳까지 왔소.
그러나 아직, 진정 천하를 평정할 인물이 누구인지 지켜보고 있었소.”
조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순욱의 손을 두 손으로 맞잡았다.
“오늘 순공을 만난 것은 하늘의 뜻이오!
내 자방(張良)을 얻은 것과 같다!”
순욱의 가슴에도 오랜만에 뜨거운 불길이 일었다.
그는 조조의 손을 꼭 잡으며 답했다.
“맹덕공, 저 순욱, 오늘부터 당신과 함께 천하의 대업을 도모하겠소.”
그 순간, 두 사람의 눈빛이 교차했다.
밖에서는 여름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었고,
기주의 하늘 아래, 난세를 뒤흔들 두 영웅의 운명이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맞닿았다.
그러나 그 운명적 만남은 단순한 인사와 결의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날 밤, 한복의 연회가 이어졌다.
기주 목관의 연회장은 촛불과 술잔, 그리고 각지의 인재들로 가득했다.
조조는 술잔을 들고 순욱에게 다가왔다.
“순공, 자네는 어찌 이 난세에서 조정의 길을 버리고 이곳까지 왔는가?”
순욱은 술잔을 받아들며 천천히 말했다.
“조정은 이미 썩었습니다. 동탁이 황제를 폐위하고, 충신을 죽이고, 백성을 짓밟았습니다.
저는 그곳에 남아 있어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았지요.”
조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불현듯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나 역시 어린 시절 조정에서 벼슬을 했소.
그러나 그곳에는 정의도, 대의도 없었지.
나는 내 손으로 세상을 바꿀 결심을 했소.”
순욱은 조조의 눈빛에서 흔들림 없는 결의를 읽었다.
“맹덕공, 자네는 이 난세를 어떻게 평정할 생각이오?”
조조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강한 군대와 현명한 책사, 그리고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
그것이 천하를 얻는 길이오.
나는 자네와 같은 인재가 필요하오.”
순욱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책략을 펼칠 무대를 찾고 있었습니다.
만약 맹덕공이 진정 백성을 위한 길을 걷는다면, 저도 그 길을 함께하겠소.”
연회가 끝난 뒤, 조조는 순욱을 따로 불러 조용한 방에서 다시 마주 앉았다.
밖에서는 여름비가 내리고, 방 안에는 촛불만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순공, 자네는 나의 자방이 되어줄 수 있겠소?”
순욱은 잠시 침묵하다가, 또렷한 목소리로 답했다.
“맹덕공, 저 순욱, 당신과 함께라면 어떤 고난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 난세를 평정할 책략, 모두 바치겠습니다.”
조조는 크게 웃으며 순욱의 어깨를 두드렸다.
“좋다! 오늘부터 자네는 내 곁의 사마(군사참모)요.
천하의 대업을 함께 이루자!”
그날 밤, 순욱은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들었다.
그의 꿈속에는, 황량한 들판을 가로지르는 군마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며칠 뒤, 조조는 순욱을 데리고 군영을 순시했다.
병사들은 조조와 순욱이 나란히 걷는 모습을 보고 속삭였다.
“저분이 바로 순문약이라더라.
조조가 자방을 얻었다니,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군.”
순욱은 조조의 곁에서 군사들을 살피고, 병사들과 직접 대화하며 그들의 사정을 물었다.
조조는 순욱에게 속삭였다.
“군중의 마음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오.
자네의 지혜가 필요하네.”
순욱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맹덕공, 천하의 대업은 백성의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저는 그 길을 함께 찾겠습니다.”
기주의 하늘 아래, 두 영웅의 운명은 이미 하나로 엮이고 있었다.
이 만남이 훗날 천하의 판도를 바꿀 것임을,
아직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처럼, 조조와 순욱의 첫 만남은 단순한 인연이 아니라
난세의 운명을 바꿀 불꽃이 피어오르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의 결의와 신념, 그리고 서로를 향한 신뢰가
기주의 밤을 밝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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